특집
K-배터리, 위기인가 전환기인가: ESS를 중심으로 본 새로운 성장축의 모색
요 약
한국 배터리산업을 둘러싼 위기론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전기차 수요 둔화, 중국의 점유율 확대, 주요국 정책 불확실성 증가 등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우리 기업의 실적 부진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부진은 글로벌 배터리산업의 성장 정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 배터리 수요는 기존 시장에서의 수요(intensive margin)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최근 새로운 응용 분야로의 수요(extensive margin)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본고는 K-배터리 위기의 근본 원인이 전기차 캐즘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주력 시장과 주력 제품의 경쟁력 약화에 있음을 밝힌다. 또한 배터리산업의 성장축이 전기차에서 에너지저장장치(ESS)로 구조적으로 확대·전환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재생에너지 확대와 AI 데이터센터 확산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미국 ESS 시장에 주목한다. 미국은 관세정책, AMPC 공급망 규제를 결합하여 중국산 ESS 의존도를 축소하고 자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미국 현지 생산 기반을 확보한 한국 배터리 기업에 새로운 성장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ESS는 글로벌 에너지 전환과 AI 산업 확산을 뒷받침하는 핵심 인프라다. ESS를 한국 배터리산업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탈중국 공급망 정책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한편, 국내 배터리 소재산업 경쟁력 강화, 주요국 산업·통상 정책 대응 체계 고도화, 차세대 ESS 기술 및 시스템 통합(SI) 기술력 강화를 위한 정책 지원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1. 들어가며
한국 배터리산업은 전기차 성장 둔화에 따른 업황 악화, 중국의 세계 시장 점유율 상승, 주요국 정책 불확실성 증가에 따른 투자 리스크 확대 등 복합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다수 배터리 기업이 최근 2~3년간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에서 실적 부진이 지속됨에 따라, 새로운 성장동력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그동안 어렵게 쌓아 올린 ‘K-배터리’ 경쟁력 자체의 훼손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본고는 최근 한국 배터리산업의 위기 원인을 분석하며 이른바 캐즘(Chasm), 즉 전기차 시장의 일시적 성장 둔화라는 단기적 현상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한국 배터리산업의 고도성장을 견인해 온 우리의 주력 시장과 주력 제품의 부진이 구조화되었기 때문임을 밝힌다. 아울러 최근 배터리 시장의 성장축이 전기차(EV) 배터리 외에도 에너지저장장치(ESS)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특히 전력망, 재생에너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핵심 설비이자 전략 품목인 ESS 분야에 대한 미국 정부의 탈중국 공급망 정책 추진이 한국 배터리 기업에 제공할 새로운 기회를 살펴본 후 ESS 성장 동력화를 위한 정책 과제를 제시한다.
2. 한국 배터리산업 위기의 본질과 성장축 전환의 필요성
(1) K-배터리 위기 원인: 주력 시장과 주력 제품의 부진 구조화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5년 EV 배터리 수요는 1.2TWh 수준으로 전년 대비 3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총수요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전기차의 글로벌 판매량이 2025년도에 처음으로 2,000만 대를 넘어서면서 성장세를 이어갔기 때문이다.1) 반면 한국 배터리산업은 여전히 어려움 가운데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포스코퓨처엠의 경우 2025년 매출이 전년 대비 각각 7.6%, 20.0%, 20.6% 감소했다. 매출뿐 아니라 영업이익 측면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포스코퓨처엠(배터리소재 부문)의 2026년 1분기 영업 손실액은 각각 2,078억 원, 1,556억 원, 11억 원에 달했다.
글로벌 수요 확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배터리 기업의 실적 부진이 이어지는 이유는 주력 시장과 주력 제품의 부진 때문이다. 한국 배터리산업의 주력 시장인 미국 시장을 살펴보면 2025년 하반기부터 전기차 판매량이 급감하고 있다. PwC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4분기와 2026년 1분기 미국 전기차(BEV) 시장 판매 증가율은 각각 -31%, -23%였다.2) 2025년 9월 트럼프 행정부가 제정한 OBBBA(One Big Beautiful Bill Act) 발효 이후 적용된 전기차 구매세액공제(Clean Vehicle Tax Credit) 폐지 영향이 컸다. 전기차 구매세액공제 폐지가 미국 내 전기차 수요를 감소시켰고, 이러한 미국 전기차 판매 감소는 최근 2~3년간 투자 여력 대부분을 미국 시장에 집중시켜 온 한국 배터리 기업의 실적을 더 크게 악화시켰던 것으로 분석된다.
주력 시장인 미국 시장의 환경 악화와 더불어 우리 배터리 업계의 주력 제품이라고 할 수 있는 삼원계(NCM) 배터리의 판매 부진도 한국 배터리산업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삼원계 배터리의 판매 부진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곳이 유럽 시장이다. 최근 유럽 시장은 미국과 달리 전기차 판매가 늘고 있다. PwC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유럽 전기차 시장은 6% 역성장했지만 1년 만인 2025년 30%로 크게 성장했다.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이 전기차 보조금을 재도입했고, 중저가형 전기차를 중심으로 수요가 반등한 영향 때문이었다. 문제는 유럽 전기차 시장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수요 확대의 혜택이 한국 배터리 기업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시장 확대에 따른 수혜 대부분을 중국 배터리 기업이 흡수하였다.
유럽 내 한·중 배터리 기업 간 점유율 변화를 보면 2023년만 해도 한국 기업의 합산 점유율이 55%에 달했으나, 수요 회복기인 2025년에는 35%로 2년 만에 무려 20%포인트가 감소했다. 반면 2023년 42%에 불과했던 중국 기업의 유럽 내 합산 점유율은 2025년 61%를 기록하며 무려 19%포인트 증가했다. 즉, 유럽 전기차 시장 수요 증가의 과실을 사실상 중국 배터리 기업이 오롯이 누린 것이다.
2023년 말부터 시작된 이른바 전기차 캐즘 현상을 겪으면서 유럽 내에서 중저가형 전기차 및 배터리에 대한 상대 수요가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성능은 우수하나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은 한국의 주력 제품 삼원계(NCM) 배터리의 판매량은 줄고, 그 공백을 성능은 열위해도 가격경쟁력이 우수한 중국의 주력 제품 LFP 배터리가 차지하였다.
(2) 새로운 성장축으로 부상하는 ESS
최근 한국 배터리산업이 겪는 어려움의 원인을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수요 부진, 즉 전기차 캐즘으로 꼽는 분석이 많지만 이는 현상을 부분적으로만 설명하는 데 그친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배터리 업계의 주력 시장인 미국과 주력 제품인 삼원계 배터리의 동반 부진이다. 미국의 전기차 지원 정책 회복이 당분간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고 LFP 배터리 점유율 상승도 지속될 전망이어서 한국 배터리산업의 위기는 단기적 현상을 넘어 중장기적으로 구조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한때 반도체와 더불어 한국 제조업의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평가받던 이른바 ‘K-배터리’의 성장 신화는 막을 내린 것인가?
배터리는 전기차 등 미래 모빌리티 분야뿐 아니라 탈탄소화와 AI 전환의 핵심 인프라로, 그 어떤 분야보다도 높은 성장성을 보유하고 있다. 장치산업 특유의 경기순환성(Cyclicality) 때문에 단기적으로 등락을 겪을 수 있지만 사이클을 타면서 중장기적으로 우상향 성장을 예상하는 이유다. 물론 한국 배터리산업이 강력한 공급망 경쟁력과 대규모 내수시장을 보유한 중국 배터리산업에 앞선 경쟁우위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첨단산업을 둘러싼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한국 배터리산업은 미국 중심의 첨단산업 공급망에서 독보적인 기회를 확보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탈탄소화와 AI 전환의 핵심 인프라면서 미국 중심의 첨단산업 공급망에서 대중국 경쟁우위를 확보할 가능성이 높은 분야가 바로 에너지저장장치(ESS)다.
ESS 성장성의 첫 번째 동인은 전 세계적인 재생에너지의 확대 추세다. 기후위기 대응과 탄소중립 달성, 그리고 지정학적 갈등 심화에 따른 에너지 안보 강화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전력 믹스에서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는 연료비와 탄소 배출이 적다는 장점이 있지만, 기상 조건에 따라 발전량이 크게 변동하는 특성이 있다. 전력 생산과 소비가 실시간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전력망에서 이러한 간헐성(Intermittency)은 계통 운영비용을 높이고 계통의 수용능력을 초과하는 경우 출력제한을 유발한다. ESS는 잉여전력을 저장했다가 초과수요 상황에서 전력을 공급함으로써 재생에너지의 활용률과 전력망 유연성을 높여주는 핵심 설비다. 따라서 글로벌 시장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이 확대된다면 ESS 시장도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한다.
두 번째 동인은 AI 데이터센터의 확산이다. 생성형 AI의 학습과 추론을 위해서는 막대한 연산능력과 전력이 요구된다. 미국 에너지부 산하의 LBNL(Lawrence Berkeley National Laboratory) 보고서에 따르면 데이터센터는 2023년 미국 전체 전력 소비의 4.4%를 차지했으며, 2028년에는 그 비중이 6.7~12.0%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3) 이에 따라 AI 데이터센터에서 ESS 역할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정전뿐 아니라 순간적인 전압 강하와 주파수 변동에도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배터리를 기반으로 한 무정전 전원 장치(UPS)를 통해 서비스 연속성과 전력 품질을 유지한다. 또한 AI 데이터센터가 밀집한 지역에서는 대규모 계통용 ESS가 송전 제약과 전력수급 변동을 완화하는 핵심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계통 여유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ESS가 피크 수요를 분산하고 데이터센터의 순간 최대전력 수요를 완화함으로써 제한된 계통 용량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보완 수단이 될 수 있다.
글로벌 ESS 시장은 2023년 기준으로 185GWh 규모로 추정되며, 연평균 19% 증가하여 2035년 1,449GWh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응용 분야별로 보면 전력망(Grid)용 ESS가 전체 시장 성장세를 이끌 것으로 예상되나, 성장 속도 측면에서 보면 AI 산업 발달로 AI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UPS의 성장률이 가장 빠를 것으로 전망된다. 2023년부터 2035년까지 연평균 증가율 기준으로 전력망용 ESS와 UPS 증가율은 각각 14%, 40% 수준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글로벌 ESS 시장의 확대가 곧바로 한국 배터리 기업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ESS의 주력 제품으로 자리 잡은 LFP 배터리는 원료·소재 공급망, 생산 규모 및 제조원가 측면에서 중국 기업이 압도적인 경쟁우위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경쟁 구도가 유지된다면 글로벌 ESS 시장의 성장 수혜는 중국 기업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미국 ESS 시장은 한국 배터리 기업에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새로운 성장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 이유는 미국이 단순히 ESS 설치를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세와 세액공제, 연방 조달 규제 등을 결합해 중국 의존도를 낮춘 ESS 공급망을 구축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탈중국 ESS 정책은 중국산 제품의 미국 시장 진입 비용을 높이는 동시에 미국에서 생산되는 한국산 배터리의 가격경쟁력을 상대적으로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무엇보다 이미 미국 내 대규모 생산 거점을 보유한 한국 기업은 수출에 의존하는 중국 기업보다 이러한 정책 변화의 수혜를 직접적으로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
3. 미국의 탈중국 공급망 재편과 K-배터리의 새로운 성장 기회
(1) 미국 ESS 시장 전망
제2장에서 재생에너지 확대와 AI 데이터센터 확산이 글로벌 ESS 시장의 성장을 견인하는 구조적 동인임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변화가 가장 빠르게 새로운 시장 수요로 이어지고 있는 지역 가운데 하나가 미국이다. 미국은 대규모 재생에너지 설비와 AI 데이터센터가 집중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전력망 투자와 ESS 보급을 지원하는 정책 수단이 비교적 강하게 작동하고 있어 향후 글로벌 ESS 시장의 핵심 수요처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ESS 시장은 전력망(Grid)용 ESS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대될 전망이다. 미국 ESS 시장 수요는 2023년 기준 55GWh 규모로 추정되며, 연평균 16% 성장하여 2035년 320GWh 규모의 거대시장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응용 분야별로 보면 전력망(Grid)용 ESS가 시장 규모 측면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나, 성장 속도 측면에서는 AI 데이터센터용 UPS에 탑재되는 배터리(ESS)가 연평균 47%씩 빠르게 성장하면서 2035년이 되면 AI 데이터센터용 UPS 시장이 135GWh 규모로 확대되어 전력망(Grid)용 ESS 시장(156GWh)에 근접하는 새로운 대규모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2) 미국의 탈중국 ESS 정책
미국 ESS 시장이 한국 배터리산업에 유망 시장으로 떠오르는 이유는 단순히 높은 성장성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관세, 생산세액공제(AMPC), 연방 조달 규제 등을 결합한 공급망 재편 정책이 추진되면서 한국 배터리 기업의 경쟁 여건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미국 정부가 중국산 ESS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추진 중인 주요 정책과 그 내용을 살펴본다.
1) 관세
첫 번째 정책 수단은 중국산 ESS 배터리에 대한 관세 인상이다. 먼저 미국은 무역법 301조에 따라 2026년부터 ESS용 리튬이온 배터리에 25%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또한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2025년 2월과 4월에 각각 펜타닐 관세와 대중국 상호관세를 부과하였다. 그러나 2026년 2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IEEPA에 근거한 해당 관세를 위법·무효라고 판결함에 따라 현재는 효력을 상실한 상태이다. 이에 미국 행정부는 대법원 판결 직후인 2월 24일 무역법 122조에 의거하여 150일간(7월 23일 종료 예정)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10%의 관세를 부과한 바 있고 현재는 법정 기한인 150일이 지나 종료되었다. 그러나 미국 행정부는 무역법 제301조를 근거로 강제노동 관련 조사 결과에 따른 새로운 관세 체계를 도입하였으며, 지난 7월 24일부터 ESS를 포함한 중국산 전 제품에 12.5%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였다.
한국산 ESS에 부과된 미국의 관세 현황은 아래와 같다. 한·미 FTA 협정세율에 따라 한국산 ESS는 기본적으로 무관세다. 다만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IEEPA에 근거하여 한국산 수입품에 대해 2025년 4월 5일부터 8월 6일까지는 10%의 상호관세를 부과했다가, 한·미 관세협정 체결로 상호관세율이 최종 15.0%로 확정된 바 있다.4) 다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한국산 제품에 대한 15%의 상호관세 역시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로 2026년 2월 24일에 종료되었고, 무역법 122조에 근거한 임시관세 10% 역시 종료된 상태다. 현재는 무역법 301조에 근거한 12.5%의 관세가 적용 중이다.
현시점 기준으로도 중국산 ESS와 한국산 ESS 간의 미국 수입관세율 격차는 28.4%포인트에 달한다. 대중국 견제 강화라는 미국의 통상정책 방향성을 고려하면 향후 한국산 ESS와 중국산 ESS 간의 관세율 격차는 28.4%포인트 이상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중국산 ESS에 상대적으로 높은 관세율을 적용한다고 해서 미국 시장에서 중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 기업은 LFP 셀 제조원가에서 여전히 상당한 경쟁우위를 확보하고 있어 일정 수준의 관세가 부과되더라도 한국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ESS 제품보다 낮은 가격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한국산과 중국산 제품 간 관세율 격차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확대·유지될 경우 과거와 같은 압도적인 가격 차이는 상당 부분 축소될 수 있다. 특히 관세가 첨단제조 생산세액공제(AMPC)와 결합되면 중국산 수입 제품과 한국 기업의 미국 현지 생산 제품 간 가격 격차가 더 크게 축소되거나 역전될 가능성도 있다.
2) AMPC 유지와 중국 공급망 규제 신설
두 번째 정책 수단은 내국세법(IRC) 제45X조에 따른 첨단제조 생산세액공제(Advanced Manufacturing Production Credit, AMPC)이다. 미국에서 배터리 셀과 모듈을 생산·판매하는 기업은 셀의 경우 kWh당 35달러, 모듈은 kWh당 10달러의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셀과 모듈을 모두 미국 현지에서 생산·판매할 경우 kWh당 최대 45달러의 세액공제가 제공된다. 이는 미국 현지에서 ESS용 배터리 셀과 모듈을 생산하는 기업의 실질적인 제조원가를 크게 낮춰 원가경쟁력을 제고하는 효과를 가진다.
전기차 구매세액공제(IRC 제35D조)는 OBBBA 시행 이후 2025년 9월 말 종료된 반면, 배터리 생산에 대한 AMPC의 기본 지원 구조는 유지되었다. 다만 OBBBA 제정 이후 적용된 중대한 변화는 금지외국기관(Prohibited Foreign Entity, PFE)으로부터 원료, 부품, 기술 등 실질적 지원(material assistance)을 받은 제품에 대해 AMPC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하는 새로운 규제가 도입됐다는 점이다. PFE는 중국, 러시아, 이란 등 우려 국가와 연계된 특정외국기관(Specified Foreign Entity, SFE)과 이러한 기관(SFE)이 일정 수준 이상의 지배력을 보유한 외국영향기관(Foreign Influenced Entity, FIE)으로 구성된다. 실질적 지원의 판단 여부는 직접 재료비 중 PFE가 아닌 공급원으로부터 조달한 원가의 비율(Material Assistance Cost Ratio, MACR)이 법정 기준 이하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배터리 부품의 경우 해당 비율은 2026년 60%, 2027년 65%, 2028년 70%, 2029년 80%, 2030년 이후는 85% 이상으로 해마다 늘어나는 구조다. 대부분의 중국 기업이 PFE에 해당되며, 배터리는 핵심광물과 소재 분야에서 중국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므로 미국 현지 생산을 통해 AMPC를 받기 위해서는 사실상 탈중국 공급망을 구축해야 한다.
물론 이 규정은 단기적으로는 한국 배터리 기업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LFP 양극재, 흑연, 전구체 등에서 중국 의존도가 높아 단기간에 탈중국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지배구조와 기술 라이선스, 원료·소재 조달 측면에서 PFE 규정을 충족하기는 중국 기업이 한국 기업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작년 9월 도입된 AMPC의 PFE 규제는 미국 현지 생산이 가능하고 탈중국 공급망 구축 성공 가능성이 높은 한국 기업이 미국 시장 내 원가경쟁력 확보 측면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3) H.R.1166과 미국 연방 조달 시장의 ESS 탈중국화 시도
세 번째 정책 수단은 중국산 배터리에 대한 연방 조달 제한이다. 2025년 3월 미국 하원을 통과한 H.R.1166, 「Decoupling from Foreign Adversarial Battery Dependence Act」는 미국 국토안보부(DHS)가 CATL, BYD 등 법안에 명시된 특정 중국 기업이 생산한 배터리를 조달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원을 통과한 법안에 따르면 2027년 10월부터 국토안보부에 배정되거나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은 해당 기업이 생산한 배터리 조달에 사용할 수 없다. 다만 국가안보·데이터·인프라 위험이 없고 가격과 품질이 유사한 대체품을 확보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예외가 허용된다.
이 법안은 미국 민간 ESS 시장 전체에서 중국산 배터리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며, 직접적인 적용 범위도 미국 국토안보부 조달에 한정된다. 따라서 H.R.1166 하나만으로 중국산 ESS가 미국 시장에서 퇴출될 것으로 예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전력망용 ESS와 AI 데이터센터용 ESS가 핵심 인프라의 안정적 운영과 사이버 보안에 직결된다는 점에서, 이 법안은 향후 공공 부문의 배터리 조달 기준이 가격과 성능뿐 아니라 공급자의 국적, 지배구조 및 데이터 보안까지 고려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H.R.1166은 2025년 3월 상원 국토안보·정부업무위원회에 회부된 이후 아직 처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특히 현 119대 의회가 종료되는 2027년 1월 초까지 제정되지 못하면 법안은 폐기되고 차기 의회에서 다시 발의되어야 하므로 현 의회 임기 내 처리 여부가 가장 중요한 변수이다. 2026년 11월 중간선거 이후 상원 구성이 달라질 가능성과 선거 이후의 레임덕 회기에서 법안이 처리될 가능성도 향후 입법 경로의 불확실성을 높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단전략산업에 대한 대중국 견제 강화와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에 대해서는 미 정가에 초당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설령 H.R.1166이 폐기된다고 하더라도 중국산 배터리에 대한 연방 조달 제한은 향후 다른 법안이나 조달 규정을 통해 재추진될 가능성이 있다. 더 나아가 중국산 배터리 규제가 국토안보부 조달을 넘어 국방, 에너지, 통신, 데이터센터 등 공공 조달 전반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 경우 미국 현지 생산 기반과 탈중국 공급망을 확보한 한국 기업의 상대적인 미국 시장 접근 여건은 개선될 수 있다.
4. 나가며
한국 배터리산업이 직면한 어려움은 단순히 글로벌 배터리 수요 감소만의 문제가 아니라 배터리산업 성장축의 변화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로 볼 수 있다. 전기차 중심의 기존 성장축은 미국 시장 둔화와 제품 구조 변화로 성장세가 둔화된 반면, ESS는 탈탄소화와 AI 전환이라는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 속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ESS 시장 확대와 함께 관세정책, AMPC 공급망 규제를 결합하여 중국산 제품 의존도를 낮추고 자국 중심의 ESS 공급망을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고성장이 예상되고 탈중국 공급망 정책이 강화되는 미국 ESS 시장은 향후 한국 배터리산업의 신 주력 시장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미국 ESS 시장이라는 새로운 성장 기회를 실질적인 성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기업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산업·통상 정책을 연계한 정부 차원의 전략적 대응이 요구된다.
첫째, 미국의 탈중국 공급망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배터리 소재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은 첨단제조 생산세액공제(AMPC)를 유지하는 대신 PFE 규제 도입을 통해 중국 공급망 의존도를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편했다. 이에 따라 미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미국 현지 생산뿐 아니라 소재와 핵심광물까지 포함한 탈중국 공급망 구축이 핵심 과제다. 정부는 그동안 공급망 경쟁력 강화를 위해 다양한 지원 정책을 추진해 왔지만, 중국과의 원가 격차를 근본적으로 축소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현재 추진 중인 정책 가운데 가장 실효성이 높은 방안은 국내생산세액공제다. 최근(8월 7일) 산업통상부는 이차전지를 포함한 6개 분야에 대한 국내생산세액공제 신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앞으로 세부 지원 내용을 구체화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우리 배터리산업은 소재는 국내에서 생산해 해외 생산 거점으로 수출하는 구조가 정착되어 있다. 따라서 배터리 소재에 대한 국내생산세액공제 적용은 소재 기업의 경쟁력 제고와 탈중국 공급망 구축을 촉진하는 동시에 미국 ESS 시장에서 우리 기업의 경쟁우위를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현행 세액공제는 법인세 납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적자 상태인 기업은 실질적인 지원을 받기 어렵다. 따라서 배터리 소재 기업의 투자 확대와 공급망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국내생산세액공제 세부 내용 결정 시 세액공제의 직접 환급 또는 제3자 양도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확정할 필요가 있다.
둘째, 주요국의 산업·통상 정책 변화에 선제적 대응 체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최근 배터리산업의 경쟁은 개별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공급망, 제도 및 국제규범을 포함한 국가 간 경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EU의 배터리법과 산업가속화법(IAA), 미국의 IRA, OBBBA 및 PFE 규제, G7 핵심광물 협력 등은 향후 글로벌 배터리산업의 경쟁환경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이러한 제도 변화에 관한 정보를 산업계와 신속히 공유하고, 통상 협상 과정에서 우리 산업계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대응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핵심광물 개발, 재활용, 공급망 추적 체계 구축 등에서 협력을 확대하여 특정 국가에 대한 공급망 의존도를 단계적으로 완화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미국의 PFE 가이드라인과 관세정책을 비롯하여 주요국 산업·통상 정책의 세부 제도 변화를 상시 모니터링하고, 민관 공동 대응 체계를 강화함으로써 기업의 정책 대응 부담과 불확실성을 최소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ESS 분야를 한국 배터리산업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기 위한 기술경쟁력 강화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지금까지 국내 배터리산업은 전기차용 고성능 삼원계 배터리를 중심으로 경쟁우위를 확보해 왔으나, ESS 시장에서는 가격경쟁력과 시스템 통합(SI) 역량이 더욱 중요한 경쟁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따라서 LFP 배터리와 차세대 ESS용 배터리 기술개발 지원 강화는 물론이고, ESS 시스템을 구성하는 PCS(Power Conversion System), BMS(Battery Management System), EMS(Energy Management System) 등 ESS 핵심 시스템과 전력 변환·제어 기술까지 연구개발 지원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수요기업이 참여하는 실증 중심 연구개발과 표준화 지원을 강화하여 기술개발 성과가 조기에 사업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