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ET 50주년 해외석학 특별기고는 2026년 산업연구원 창립 50주년을 맞아 급변하는 산업환경과 주요 이슈에 대한 세계 석학들의 통찰을 담기 위해 기획되었다. 2025년 9월 개리 제레피 교수의 기고를 시작으로 10월 로버트 앳킨슨, 11월 우라타 슈지로 등 세계 최고 전문가의 시각으로 글로벌 산업환경의 변화를 조망하고, 향후 한국 산업의 발전 방향을 함께 고민하고 모색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본 문서에 제시된 견해는 전적으로 저자 개인의 견해이며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 본 기고문의 확장판은 2026년 3월 DG GROW의 Single Market Economics Briefs에 게재되었다.
1. 서론
유럽의 산업은 구조 전환과 지경학적 변화 속에 놓여 있다. 이 변화는 기업의 경쟁 방식과 정책입안자의 정책 설계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본 기고문은 유럽의 산업 환경을 변화시키는 주요 동향을 따라가며 그 배경과 도전과제, 그리고 도약 기회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EU 산업에 충격을 가져온 급격한 전환과 추세
유럽의 산업 환경은 다음 세 가지에 의해 재편되고 있다. 첫째, 무역 패턴의 심층적 재구성, 둘째, 산업정책을 통한 적극적 개입 급증과 이에 따른 불공정한 경쟁 여건 강화, 셋째, 미·중 기술 경쟁과 그 파급효과이다.
(1) 글로벌 무역 패턴의 재정의
중국은 지정학적 긴장과 무역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세계 상품무역에서 선도적 지위를 유지하며 글로벌 무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중국은 2024년 전 세계 상품 수출의 18%를 차지하였으며, 현재는 컨테이너 물동량의 37%를 점유하고 있다. 반면 세계 상품무역에서 EU와 미국의 입지는 지난 10여 년간 대체로 안정적인 수준으로 유지되어 왔으며, 서비스무역까지 포함하면 EU는 여전히 세계 최대 수출 권역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는 경쟁이 심화된 글로벌 무역 환경에서도 경쟁력을 지켜온 결과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 이면에서는 세계 무역구조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미·중 무역 관계가 이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2018년 이후 미국의 전체 수입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감소하였다. 멕시코와 베트남 등지를 우회한 수입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이 교역의 일부는 미·중 공급망의 중간 경유지로 제3국을 활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흐름 자체가 무역 패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반증한다.
미·중 관계 변화는 미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EU를 포함한 세계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각국은 이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책과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과잉생산 물량이 유입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경제에 미칠 잠재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 대응이 추진되고 있다.
보다 일반적으로 공급망 회복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은 세계 무역의 지리적·정치적 연합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리쇼어링, 니어쇼어링, 파트너쇼어링 전략이 증가하면서, 인접국 및 우호국으로부터 상품과 서비스를 조달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 EU 역시 단일시장과 우호국들로부터의 조달을 확대하고 있다.
(2) 산업정책의 전 세계적 확산
전 세계적으로 산업정책을 통한 정부 개입이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다. 복합적인 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각국 정부는 자국 경제와 산업구조 재편을 위한 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제정책 기조도 자유시장 중심의 정통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전략적 필요성, 지경학적 고려, 그리고 경제안보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국가별 산업정책의 지출 규모와 지원 대상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유럽은 정책 지원 규모가 다른 국가에 비해 작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국에 비해 크게 뒤처지고 있으며 미국과의 격차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OECD MAGIC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중국 기업들이 받은 정부 지원 규모는 평균적으로 매출액의 약 3% 수준으로 나타났다. 반도체와 금속산업과 같은 자본 집약적 산업에서는 15%를 초과하기도 한다. 반면 유럽 기업들이 받은 지원 규모는 매출액의 0.5% 미만에 불과하다.
중국의 국가 주도 산업 확장 정책과 수출 중심 성장 전략은 중국 기업이 낮은 수익성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생산능력을 확충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이는 지속적인 글로벌 공급과잉과 수급 불균형을 초래하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중국의 과잉생산이 EU로 유입되자 철강, 풍력, 자동차, 화학 등 유럽의 주요 산업 전반에서 그 영향이 관찰되고 있다.
미국의 관세정책 역시 적극적인 산업 개입의 또 다른 단면이다. 기업 실적발표 분석 결과, 관세는 기업 경영 전략의 주요 리스크로 부상하였다. EU와 미국의 상장기업 사업보고서에 관세 관련 불확실성을 언급하는 문장 빈도는 2025년 2분기에 급격히 증가했으며, 특히 미국 기업들의 관세 노출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3) 기술 경쟁 가속화와 유럽의 생산성 격차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은 계속 심화되고 있다. 양국은 핵심기술 개발에 전례 없는 규모의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 EU는 일부 재생에너지 및 첨단 제조 기술 분야에서 선도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지만, 디지털 범용 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과의 격차는 확대되고 있다. 특히 AI, 반도체, 양자 분야의 급진적 혁신에 대한 평가는 EU의 기술혁신 역량이 미국과 중국에 비해 얼마나 뒤처졌는지를 보여준다.
디지털 기술 격차는 EU와 미국 간 생산성 및 성장률 격차 확대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미국과 중국의 빅테크 기업이 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주도하고 있는 반면, 유럽에는 유사한 규모의 기업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빅테크 기업은 막대한 수익을 R&D 및 데이터센터와 같은 첨단 기술 인프라에 꾸준히 재투자하고 있으며, 이러한 선순환이 미·중 기술 경쟁을 통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미·중 기술 경쟁 성과는 점차 유럽 권역 밖에 집적되며 EU와의 생산성 격차를 벌려가고 있다.
3. 도전과제
급변하는 경제 환경 속에서 EU 산업은 다음과 같은 시급한 도전과제에 직면해 있다. 첫째, EU의 전통적인 산업 부문에서 높은 에너지 비용과 글로벌 경쟁 심화로 수익성과 경쟁력이 약화될 하방 위험이 확대되고 있다. 둘째, 기업들은 전략적 의존성과 공급망 리스크에 대응해야 한다. 셋째, 투자 수요는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현재의 투자 규모를 크게 상회하는 수준이다.
(1) 전통적인 EU 산업 부문의 하방 위험
화학, 금속, 시멘트와 같은 EU의 에너지 집약적 산업은 다른 제조업 분야에 비해 2022년 이후 생산량과 경기신뢰 수준이 큰 폭으로 감소하였다. 최근 경기신뢰 수준이 다소 개선되면서 업황 회복의 조짐이 보이고 있으나 향후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산업 쇠퇴 리스크는 EU 전역에 균등하게 분포되지 않는다. 녹색전환에 중요한 6개 주요 제조업 부문과 건설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산업 건전성 진단에 따르면, 고용 감소 추세가 지속되거나 악화될 경우 그 영향은 특정 지역에 집중될 것으로 분석되었다.
EU와 국제협력 파트너들이 제시한 이상적 수준의 기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산업 전반의 포괄적인 구조 전환이 필요하다. 녹색전환은 단순한 환경 차원의 과제뿐만 아니라 경제적 과제이기도 하다. 청정기술 혁신과 관련된 신산업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유연하고 기민한 정책이 요구되는 동시에 전통적인 산업 부문의 전환도 지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녹색전환은 EU가 청정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큰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전통산업이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 상당한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2) 전략적 의존성과 단일 실패지점
EU의 전략적 의존성은 유럽 산업이 직면한 주요 과제이다. 전략적 투입재와 핵심 원자재 조달 시 기업들이 지정학적 리스크, 공급망 취약성 및 비용 상승 압력에 노출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EU 역외 수입 의존성과 이를 단일시장 내 생산으로 대체할 가능성을 품목별로 분석한 상향식·데이터 기반 분석 결과에 따르면, EU는 204개 품목에서 대외의존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품목 수입량의 절반 이상이 중국을 최대 공급원으로 삼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또한 전략적 의존 품목 중 약 20%는 전 세계 생산이 특정 국가나 공급자에 고도로 집중되어 있어, 수입선 다변화의 여지가 매우 제한적인 단일 실패지점으로 평가된다. 광범위한 지정학적 불확실성은 전략적 의존성과 더불어 EU 기업의 공급망 긴장도를 높이는 핵심 원인이다. 많은 기업이 생산에 필수적인 핵심 투입재를 EU 역외에서 조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약 2,000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분석한 결과, 수입 의존도가 높은 EU 기업이 공급망 압력을 더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필수 투입재를 해외에서 공급받는 기업, 특히 중국 공급업체 수입에 의존하는 기업일수록 원자재와 반도체 조달을 둘러싼 무역 긴장에 더욱 크게 노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3) 현재 투자 규모를 상회하는 대규모 투자 수요
유럽중앙은행은 2025~2031년에 녹색전환, 디지털 전환 및 국방 역량 강화에 필요한 전략적 투자 규모가 매년 약 1조 2,000억 유로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투자 규모는 이러한 투자 수요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EU와 미국 간 기업투자 격차는 점차 벌어져 왔는데, 미국은 기업투자가 빠르게 회복한 뒤 계속 증가해 온 반면, EU의 투자 회복세는 훨씬 더뎠기 때문이다.
최근 투자 지표는 미국과 EU의 투자집약도 격차가 앞으로 더욱 확대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불확실성 확대, 수요 부진, 긴축적인 금융 여건과 같은 단기적 요인뿐만 아니라 구조적 제약 역시 EU의 기업투자를 저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미국에서는 데이터센터와 인공지능 관련 인프라 투자가 급증하며 최근 투자를 견인하고 있으며, 투자 증가 속도는 EU를 크게 앞서고 있다.
EU와 미국 간 투자 격차를 초래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는 EU의 저축이 역내 생산 투자로 전환되는 채널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U의 가계 저축 규모는 미국보다 훨씬 크지만 이 자금이 유럽 내 기업투자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매년 약 3,000억 유로의 저축이 유럽 기업의 스케일업에 투입되기보다 오히려 미국 금융시장으로 유출되고 있다. 유럽의 자본시장은 규모가 작고 분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업 성장 단계 전반에 걸쳐 EU에서 활용 가능한 자본 규모는 미국보다 약 80~84% 적으며, 특히 후기 성장 단계의 자금 조달에서 그 격차가 더욱 크게 두드러진다.
4. 도약 기반
급변하는 대외 환경과 당면한 도전과제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경쟁력과 회복력을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 역시 존재한다. 특히 이러한 도약 기회는 다음 세 개의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첫째, 단일시장의 통합 고도화, 둘째, 경제안보 정책과 새로운 재정수단의 적극적인 활용, 셋째, 보다 일관되고 현대적인 산업정책의 추진이 그것이다.
(1) 단일시장 통합 고도화
EU의 강점은 회원국 간 통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EU의 단일시장은 이러한 통합을 견인하는 핵심 동력이다. 단일시장 출범 이후 회원국 간 교역은 약 63% 증가하였으며 지난 30여 년간 EU의 경제 성장을 뒷받침해 왔다. 단일시장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한 기존 연구를 종합한 메타분석에 따르면, 단일시장은 유럽 전역에 걸쳐 유의미한 후생 증대를 가져왔다. 보수적으로 추정하더라도 단일시장은 EU GDP의 최소 3% 이상을 높이는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평가된다.
단일시장의 고도화는 EU가 이른바 이중 배당을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즉,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동시에 산업과 경제의 회복력을 강화하는 노력을 지지하는 기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단일시장이 EU에 가져온 후생 증대가 현재보다 최대 두 배까지 커질 수 있으며, 리쇼어링 정책이 유발하는 단기적인 비용도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단일시장 통합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회원국 간 규제의 분절, 국가별로 상이한 이해관계, 더딘 규제 도입 속도, 그리고 과잉입법 등 다양한 장애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EU 기업의 규제 준수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진전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서비스 분야에서는 규제 장벽이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단일시장 통합 고도화에 기대되는 경제적·전략적·지정학적 편익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EU가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할 핵심 정책과제임은 분명하다.
최근에는 정책입안자와 이해관계자들이 단일시장 고도화를 저해하는 가장 시급한 장애 요인을 제거하려는 의지를 다지고 있으며, 복합적인 글로벌 환경 속에서 통합되고 일원화된 시장이 유럽의 경쟁력과 회복력을 유지·강화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공감대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2025 단일시장 전략은 10대 규제 장벽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2) 경제안보 정책과 전략적 장기예산의 촉매 효과
EU는 강화된 경제안보 전략을 반영한 정책 패키지를 마련하여 전략산업의 재산업화를 추진하고 있다. 핵심원자재법, 반도체법, 탄소중립산업법, 그리고 산업가속화법이 대표적인 정책 입안 사례이다. 이러한 정책 이니셔티브는 공급 측면과 수요 측면의 정책 수단을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공급 측면의 대표적인 정책 수단인 인허가 절차 간소화는 생산 역량 확충을 촉진하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으나,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수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산업 성과로 이어지기 어렵다. 충분한 수요가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인허가 절차가 간소화되더라도 기업이 시설 확장에 필요한 대규모 초기 투자 비용 집행 결정을 내리기 어렵고 사업 확장에 필요한 자금 조달 역시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산업가속화법 제정안은 공공 조달과 공공 지원에 비례적이고 합리적인 수준의 EU 생산요건과 저탄소 기준을 도입하고 있다. 이는 유럽산 제품 수요를 확대하기 위한 것으로, 특히 에너지 집약적 산업, 자동차 가치사슬 전반, 청정기술 분야의 수요 확대를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노력은 이미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는데, 2025년 3월 핵심 원자재 분야 전략 프로젝트가 최초로 승인되었다. 이와 더불어 유럽의 투자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EU의 장기예산 체계가 필요하다. 장기예산 체계는 전략적 정책 목표를 우선 반영하면서도 급변하는 지정학적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EU의 재정지원 제도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분산되어 있고 복잡하며 경직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2025년 7월 새로운 EU 다년도재정체계안을 채택하였다. 이 제안에는 새로운 유럽경쟁력기금의 신설이 포함되어 있다. 유럽경쟁력기금은 총 4,510억 유로 규모의 재원을 바탕으로 유럽의 장기 경쟁력 확보에 필수적인 전략 분야에 중점적으로 투자할 예정이다. 청정 전환, 보건, 디지털 혁신, 회복력 및 안보의 네 개 투자 분과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전략 분야에서 연구개발부터 산업화에 이르는 전 과정의 투자 연계를 지원하는 체계 구축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보조금과 융자를 포함한 다양한 금융 수단을 활용하여 기업투자를 촉진하고, 투자 리스크는 완화할 계획이다.
또한 유럽경쟁력기금은 간소화된 절차와 제도적 유연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책 우선순위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이를 통해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 속에서 EU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재 이를 EU 장기예산에 어떻게 편입할 것인지에 대해 EU 기관 간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3) 미래지향적 산업정책 프레임워크의 부상
경제의 구조 전환과 역량 강화를 촉진할 수 있는 전략적이고 정교한 산업정책의 잠재력에 관한 학술 연구가 꾸준히 축적되고 있다. 최근 연구들은 왜 산업정책을 사용해야 하는지보다 어떻게 설계하고 실행할 것인가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 주로 산업정책이 경제 성장과 회복력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조건들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Rodriguez-Pose는 복합적인 산업정책 프로그램을 효과적으로 설계하고 집행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제도적 체계와 높은 수준의 제도적 역량이 핵심적인 전제조건이라고 강조한다. 지나치게 포괄적이거나 목표가 불명확한 정책 프레임워크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지적하는 연구는 정책 목표의 명확성과 일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기업 간의 전략적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구는 적절한 유인과 책임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설계되어야 하며, 정부와 기업의 협력관계가 투명하고 체계적으로 운영되면 산업정책의 집행 효과는 물론 정책의 실질적인 성과까지 크게 제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 속에서 보다 일관되고 실효성 있는 유럽 산업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핵심 요소들은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다. 첫째, 산업정책 목표를 보다 긴밀하게 정렬하고, 분산된 정책 집행 체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신속하고 유연한 정책 집행 역량을 확보하는 것이다. 둘째, 성공 가능성이 높은 고성장 시장을 전략적으로 선별하여 현재 강점을 가진 산업 분야를 집중 지원하는 것이다. 셋째, 강한 임무지향적 접근을 통해 점진적인 개선에 머무르지 않고 신규 기술 분야에서 더 과감하고 위험 감수적 혁신에 도전하는 것이다. 넷째, 단일시장 내에서 연구개발, 급진적 기술혁신, 그리고 기업의 스케일업을 촉진할 수 있도록 투자 유치와 지속적인 확보를 지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프라 확충, 안정적인 수요 기반 조성, 회복력 있는 핵심 투입재 공급망 구축, 그리고 미래 수요에 부합하는 인재·기술 역량의 확보를 통해 산업정책 목표가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최근의 학술 연구는 증거 기반으로 새로운 개념적·분석적 틀을 제시하여 산업정책에 관한 논의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EU가 변화하는 환경에 적합하도록 산업정책을 재정비하고, 현재 보유하고 있는 강점과 잠재적 경쟁우위를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데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유럽은 디지털 분야에서는 경쟁력의 한계를 안고 있지만, 재생에너지, 첨단 소재, 첨단 제조 등 일부 전략기술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혁신 선도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고 제약, 화학, 기계 등 분야에서도 여전히 세계적인 산업 경쟁력을 갖춘 제조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5. 결론
우리는 급변하는 지정학적·지경학적 환경 속에서 EU 산업이 직면한 도전과제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도약 기반을 함께 살펴보았다. 비용 상승 압력, 전략적 의존성, 그리고 투자 부족은 유럽과 주요 경쟁국 간 경쟁력 격차를 더욱 확대시킬 위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도약 기회도 존재한다.
핵심은 EU 단일시장의 통합을 한층 심화하고, 강화된 경제안보 정책과 전략적으로 재편된 EU 장기예산이 갖는 촉매 효과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EU 차원의 산업정책은 유럽의 경쟁우위를 바탕으로 기술적·상업적 강점을 장기적인 전략적 성과로 연결할 수 있도록 추진되어야 하며, 또한 자본이 보다 생산적인 산업활동에 효율적으로 재배분되도록 지원하고, 유럽 산업의 경쟁력 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청정하고 회복력 있는 공급망과 생산 역량 구축을 더욱 가속화하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저자 소개
- 로만 아르호나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직무 및 OECD 산업·혁신·기업가정신위원회 부의장을 맡고 있다. 또한 유럽경제정책연구센터의 유럽경제정책네트워크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연구혁신총국에서 수석이코노미스트 겸 전략·미래전략 담당 책임자를 역임했으며, OECD 과학기술정책위원회 부의장도 지냈다. 그에 앞서 스페인 정부에서 과학·기술·혁신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합류하기 전에는 스페인 과학기술 담당 국무장관과 과학기술부 장관의 자문관으로 근무하였다. 유럽투자은행과 국제통화기금에서 근무했으며, OECD에서도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하였다. 또한 세계경제포럼의 유럽 포용적 성장 및 경쟁력 연구소 고위급 자문그룹과 새로운 성장모델 글로벌 어젠다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하였다. 발렌시아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벨기에 브루게의 유럽대학원에서 유럽경제학 석사학위를,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럽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 프랭크 반데르메이렌은 2020년부터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성장총국 수석이코노미스트팀에서 팀장으로 재직하며 경쟁력, EU 단일시장, 산업정책을 주요 담당 분야로 하고 있다. 벨기에 KU Leuven과 스페인 ESADE에서 각각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