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포커스
글로벌 AI 풀-스택 경쟁과 우리나라의 대응: AX 확산을 넘어 공급 역량으로
요 약
우리나라는 제조기업의 인공지능 전환(AX) 확산에 적극적이나, 이를 구동하는 핵심 공급 기반은 해외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글로벌 경쟁은 개별 기술(스택)을 넘어 에너지에서 응용까지 가치사슬 전체를 장악하는 풀-스택 수직 통합(vertical integration) 경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플랫폼 락인(lock-in) 효과로 인해 소수 기업의 우월적 지위가 고착되고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 공급 부문에 대한 고려 없는 AX 확산은 해외 플랫폼에 대한 종속, 곧 AX 무대에서의 소부장 위기 재현으로 귀결될 수 있다. 본고는 그 돌파구를 AI 생태계와 AX 생태계의 차별성에서 찾는다. 범용 지능을 ‘생산’하는 상위 스택은 자본과 규모의 경쟁으로 추격이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그 지능을 산업 현장에서 ‘구현’하는 산업 특화형 AI(Vertical AI)와 그 공급 역량은 축적된 제조 경험을 가진 우리나라의 현실적 승부처이다. 이에 본고는 범용 AI에 집중하는 빅테크의 네 가지 구조적 한계를 분석하고 주요국 동향을 검토한 뒤, AX 확산을 넘어 공급 역량 강화로 나아가는 대응 방향으로서 수요·공급의 병행과 운영 표준(operational standard)의 선점을 제시한다.
1. AX 확산을 넘어 공급 역량으로
우리나라의 제조업은 지난 공급망 위기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단 세 종의 수입이 제한되자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이 멈춰 설 뻔했다. 최종 완성품의 우월한 경쟁력에도 공급망의 핵심 요소를 외부에 의존하면 경제 안보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정부가 대규모 연구개발 투자와 제도 정비로 소부장 자립화에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제조기업의 인공지능 전환(AX) 확산에 적극적이다. 그러나 AX를 구현하는 핵심 공급 기반은 해외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글로벌 경쟁은 기술 단위, 즉 개별 스택(stack)을 넘어 에너지에서 최종 서비스 단계까지 가치사슬 전체를 장악하는 풀-스택(full-stack) 수직 통합 경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플랫폼 생태계 특유의 락인(lock-in) 효과를 고려하면, 풀-스택 경쟁은 소수 기업의 우월적 지위 확보로 진행될 것이 분명하다. AI 도입과 확산은 제조기업의 경쟁력 제고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현재의 경쟁 양상을 고려할 때, 공급 부문에 대한 고려 없는 AI 도입과 확산은 글로벌 플랫폼에 대한 종속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AX 무대에서 소부장 사태의 재현이 우려되는 이유이다.
본고에서는 AI 생태계와 AX 생태계의 차별점에서 우리나라의 돌파구를 모색한다. AI 생태계는 범용(general purpose) AI 개발에 집중하며 똑똑한 AI 풀-스택 개발 능력의 확보가 경쟁력을 결정한다. 이에 풀-스택 전략을 기반으로 글로벌 빅테크들의 핵심 전장이 되고 있어, 우리나라의 우월적 지위 확보가 사실상 불가능한 영역이다. 반면 AX 생태계는 AI의 범용 지능을 산업 현장에 적용하는 능력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즉, 축적된 제조 경험과 역량이 필수적이므로 우리나라의 현실적 승부처가 될 수 있는 분야이다. 이에 범용 AI 모델에 집중하는 빅테크의 한계를 분석하고 AI와 대비되는 AX 공급 기반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대응 방향을 모색해 본다.
2. 풀-스택(Full-stack) 경쟁으로의 전환
(1) AI 생산 스택: 엔비디아의 5-Layer Cake
엔비디아는 산업적 관점에서 인공지능을 다섯 개의 수직 계층으로 이루어진 스택(stack) 구조로 설명하며, 이를 ‘5-Layer Cake’라 부른다. 에너지에서 응용(application)에 이르는 계층을 수직으로 통합하여 범용 지능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체계이며, 본고에서는 이를 ‘AI 생산 스택(Stack)’이라 칭한다.
5-Layer Cake의 가장 하위에는 에너지 계층이 자리한다. 에너지는 데이터센터의 가동과 AI 연산을 뒷받침함으로써, 인공지능이 생산할 수 있는 지능의 총량을 좌우한다. 그 위에는 GPU 등 반도체 하드웨어로 구성된 칩(chips) 계층이 위치한다. 칩은 방대한 데이터의 병렬처리를 통해 AI의 학습과 추론을 담당하며, 지능 생산의 확장성과 경제성을 결정한다. 에너지와 칩을 기반으로 토지·전력·건설·네트워킹에 이르는 다양한 요소와 수만 개의 프로세서를 조율하는 인프라(infrastructure) 계층이 작동한다. 데이터 저장 공간에 머물던 기존의 전통적 인프라와 달리, 5-Layer Cake에서의 인프라는 지능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공장의 역할을 담당한다. 기존 AI 인프라와 차별화하여 ‘AI 팩토리(AI Factory)’라 불리는 이유다.1) 이렇게 생산된 지능은 모델(model) 계층에서 학습과 재학습을 거쳐 범용 파운데이션 모델(foundation model)로 정립되고, 최상위의 응용(application) 계층을 통해 실제 산업현장에서 경제적 가치가 창출된다. 정리하면 5-Layer Cake라 불리는 AI 생산 스택은 전력-칩-인프라-모델-응용의 수직 통합을 통해 ‘범용 지능’을 생산하는 체계이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창출되는 가치의 대부분은 스택을 소유·통합한 주체에게 귀속된다.
그런데 현재 5-Layer Cake에서 가장 큰 병목은 지능을 생산하는 인프라 계층 즉, AI 팩토리에서 발생하고 있다. 기가와트(GW) 단위 전력의 안정적 공급, 방대한 연산을 감당할 데이터센터의 확보, 지능의 지속적 생산능력이 경쟁의 관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의 함의는 분명하다. 먼저, 다섯 계층으로 이루어진 AI 생산 스택 전체의 통합·소유는 막대한 규모의 자본을 감당할 수 있는 소수 사업자에 국한되며 그들의 우월적 지위가 이미 시장에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국가 차원의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AI 생산 스택 전체를 추격하기는 이미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적 우위를 점한 고대역폭 메모리(High Bandwidth Memory, HBM)조차 다섯 계층 가운데 칩 계층을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 AI 생산 스택 전체에서 보면 하나의 부분 또는 부품 수준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AI 생산 스택은 본질적으로 범용 지능의 생산 체계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러한 산출물은 범용 지능과 범용 AI 모델에 국한되며, 특정 산업의 도메인 지식과 무관하게 작동한다. 또한 AI 생산 스택은 생산된 범용 지능을 개별 산업의 물리적 현실(설비, 공정, 제품 등) 위에서 작동하도록 구현하는 AX 공급 기반 역량을 포함하지 않는다. 요컨대 AI 생산 스택은 범용 지능을 ‘생산’할 뿐 그 지능을 산업현장에서 ‘구현’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역량이 필요한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의 경쟁 초점을 ‘범용 지능의 생산’이 아니라 ‘생산된 범용 지능을 산업 현장에서 어떻게 가치로 전환하느냐’로 옮겨야 할 당위성이 확인된다. 전자가 자본과 규모의 경쟁이라면, 후자는 우리나라가 강점을 보유한 도메인 지식과 실제 물리적 산업 현장에서의 경쟁이기 때문이다.
(2) 풀-스택 경쟁전략의 유형화
경쟁의 패러다임이 개별 제품에서 시스템으로, 다시 개별 스택(계층)에서 생태계 전체로 단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칩과 모델 등 개별 제품의 경쟁이 스택과 생태계의 경쟁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으며, 스택 전체를 통합하는 주체가 표준과 생태계 모두를 장악하고 있다. 경쟁의 승부처가 ‘가장 좋은 제품’에서 ‘가장 완결적인 스택’으로 바뀐 것이다.
특히 인공지능은 개별 제품 또는 부품 단위의 파편적 도입만으로 작동하지 않으므로 풀-스택이 수직 통합(vertical integration)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가상 데이터 생성에서 GPU의 병렬 연산을 위한 컴퓨팅 플랫폼까지 전 영역을 포괄하려는 엔비디아의 전략이 대표적이다. 풀-스택 수직 통합의 결과, 특정 단일 스택에서의 강자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부품 공급자의 하나로 강등될 위험에 놓인다. 우리나라가 세계적 경쟁력을 보유한 메모리 분야조차 구조적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함의가 여기에 있다. 부품으로서의 위상은 견고하더라도, 스택을 통합하는 주체가 아니라면 가치 배분의 주도권은 통합자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빅테크의 풀-스택 전략은 수직 통합의 시작점(entry point)을 기준으로 다섯 가지 유형으로 관측되고 있다. 먼저 하드웨어 기점형(Hardware entry type)이다. 자사의 강점인 칩(GPU)을 기반으로 AI 전체 가치사슬을 점유하려는 전략으로 엔비디아가 대표적이다. 엔비디아는 가상의 디지털트윈(Omniverse)을 기반으로 대규모 합성 학습데이터를 생성하며(Cosmos), 이렇게 생성된 가상 환경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피지컬 AI의 학습과 검증(Isaac)을 수행하고, 학습 및 검증된 AI 모델이 피지컬 AI에 탑재되어 구동하는 모든 과정을 통합하고 있다. 엔비디아 풀-스택 전략의 핵심 무기는 개발자를 묶어두는 CUDA 생태계이며, 차세대 아키텍처와 고대역폭 메모리 통합으로 경쟁 칩과의 격차를 유지하려 한다.
두 번째 유형은 하이퍼스케일러형(Hyperscaler type)2)이다. 자사의 클라우드 수요를 기반으로 자체 칩과 모델, 응용 분야 모두를 통합하려는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의 전략이 해당한다. 구글은 자체 칩(TPU)과 모델(Gemini)을 묶어 ‘차별화된 풀-스택’을 표방하며, 앤스로픽(Anthropic)에 최대 100만 개 규모의 칩을 공급3)하고 메타에도 이를 제공4)하는 등 엔비디아의 대항마로 전환하고 있다. 아마존은 칩(Trainium)과 클라우드(AWS), 베드록(Bedrock) 플랫폼, 앤스로픽 지분을 결합하였으며,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체 칩(Maia)과 애저(Azure), 오픈AI(OpenAI)와의 제휴, 코파일럿(Copilot)을 통합하였다. 하이퍼스케일러형 전략은 수요와 공급 모두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가치 포획(value capture)이 광범위하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구글의 경우 자체 칩(TPU), 자체 모델(Gemini), 클라우드, 응용 서비스에 이르는 모든 부문을 내부화하고 있다.
세 번째 유형은 AI 모델 기점형(AI model entry type)이다. AI 모델에서 출발하여 칩과 디바이스로 후방통합을 추진하는 전략으로 오픈AI와 앤스로픽이 대표적이다. 오픈AI는 자사의 ChatGPT를 기반으로 브로드컴(Broadcom)과의 대규모 맞춤형 가속기 공동개발5)과 대규모 연산 역량 확보와 함께 전용 디바이스의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앤스로픽은 칩 공급원의 다변화를 통해 협상력 제고를 시도하고 있다. 즉, AI 모델 기점형은 AI 모델의 강자가 하드웨어 부문의 통합과 다변화를 통해 컴퓨팅의 종속을 완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된다.
네 번째 유형은 주권형(Sovereignty)이다. 수출통제에 대응하여 국가 단위로 전 계층을 자립화하는 유형으로 중국의 화웨이가 전형이다. 어센드(Ascend) 칩부터 CANN·마인드스포어 소프트웨어, 판구 모델, 클라우드, 대규모 클러스터링에 이르는 자립 스택을 구축하고, 핵심 소프트웨어를 오픈소스로 개방함으로써 자국 내 개발자 생태계의 형성을 시도한다. 주권형 풀-스택 전략은 경쟁의 주체가 국가라는 점에서 타 유형과 차별화된다.
풀-스택 전략의 마지막 유형은 테슬라와 xAI를 통해 나타나는 피지컬 AI 통합형이다. 인공지능이 자동차, 로봇, 공장 등 실물의 가동에 활용되며, 자체 설계 칩에서 슈퍼컴퓨터, 자체 AI 모델(Grok), 자율주행·로봇(옵티머스), 차량 운행 데이터, 전력까지 자사의 특정 영역 안에서 수직 통합을 구현하려는 전략이다. 가상의 디지털 모델이 아닌 물리적 현실 세계에서의 현장 운영을 통해 AI 학습 루프를 스스로 완결하는 전략이라는 점에서 다른 풀-스택 전략과 차별화된다. 무엇보다 풀-스택 진입의 열쇠가 현장 데이터와 설비 지식(OT, 운영 기술)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강점과 직접 맞닿아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전략의 핵심은 AI 경쟁의 무게중심이 디지털 가상 세계와 데이터센터를 넘어 공장과 도로 등의 물리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물리 세계에서의 경쟁은 칩이나 모델이 아닌 현장과 실제 데이터를 보유한 자가 결정적 우위를 점하게 됨을 의미한다.
(3) 풀-스택 경쟁의 귀결
상술한 풀-스택 경쟁은 명확한 결론을 제시한다. 인공지능은 조각 단위의 도입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스택 전체의 통합이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풀-스택 경쟁의 심화와 함께 가치와 지배력이 스택을 소유하고 공급하는 공급 부문으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풀-스택 통합의 주체가 칩, 모델, 도구의 표준을 선점하는 경우 그 표준은 전환이 어려운 락인(lock-in)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구조적 관점에서 인공지능의 도입과 보급 등 수요 중심 정책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해외 스택에 대한 종속을 심화시킬 수 있다. 즉, 공급 기반 없는 인공지능 도입 확대로 해외 스택에 대한 의존은 고착되고, 도입 기업의 전략적 취약성도 함께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완성품 경쟁력이 높을수록 핵심 소재의 해외 의존이 더 크게 드러났던 소부장 관련 공급망 위기의 구조가 인공지능에서 다시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AI 생산 스택의 상위 계층(범용 AI 모델, 연산, 데이터센터)은 자본과 규모의 한계로 추격이 어려운 상황이나, 그 지능을 산업 현장에 구현하는 계층, 즉 AX 인프라는 우리나라 고유의 제조 자산을 기반으로 경합이 가능한 분야이다. AI 생산 스택의 범용 지능을 물리 세계의 설비, 공정, 제품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분야별 산업 특화 지식과 제조 경험, 운영 기술과 물리 자산의 보유가 필수적이며 이들 분야는 우리나라의 강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활로는 공급 부문의 역량 강화에 있다.
3. 주요국의 동향
풀-스택 경쟁은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또는 블록 단위의 전략 경쟁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글로벌 AI를 주도하는 주요국의 정책적 움직임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자국의 조건에 부합하는 풀-스택 또는 주권 전략 강화라는 점에서 주요국의 공통점이 확인된다.
먼저 미국은 민간 빅테크가 구축한 풀-스택 우위를 국가 차원의 수출통제로 뒷받침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중국과 EU가 각각 제조 규모와 데이터 주권을 차별화 지점으로 삼는 것과 달리, 미국은 AI 생산 스택의 상위 계층 자체를 지배하는 정공법을 택하고 있다. 즉, 첨단 칩과 장비에 대한 통제로 경쟁국의 스택 구축을 지연시키는 동시에, 엔비디아의 CUDA로 대표되는 자국 생태계의 표준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하위 제조 현장 계층에서의 뚜렷한 공백이 지속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서비스 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제조 기반이 해외로 이전되면서, 공정과 운영을 통해 축적되는 암묵적 제조 경험과 도메인 역량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범용 인공지능을 생산하는 능력과 그것을 실제 공장에서 자율제조로 구현하는 능력은 별개이므로 리쇼어링과 제조업 재건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공백을 단기간에 메우기는 어렵다. 다쏘(Dassault), 액센츄어(Accenture) 등 도메인 역량 보유 기업들과의 협업을 통해 풀-스택을 구성하려는 엔비디아의 시도에는 이러한 한계가 반영되어 있다.
중국은 수출통제라는 외부 제약을 국가적 동원 체계와 거대 내수 시장의 결합을 통해 상쇄하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집중적 자원 배분과 조달로 자국 스택을 검증하고, 대규모 제조 현장과 거대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함으로써, 자국 스택의 검증과 규모의 경제 달성이 맞물리는 선순환 체계를 구축하려는 것이다. 방대한 제조 기반 위에서 인공지능을 현장에 적용하여 데이터와 도메인 경험을 빠르게 축적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거대 내수 시장이 초기 수요를 보장한다는 점이 강점으로 작용한다. 중국은 이를 통해 성능 열위를 물량과 반복적 개선으로 상쇄하는 한편, 축적한 스택을 신흥국,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로 확대해 나가고자 한다. 다만 소프트웨어의 성숙도가 미흡하고,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첨단 패키징, 선단 공정에 대한 접근이 제약되어 최상위 성능에서의 격차는 여전히 뚜렷하다.
유럽연합(EU)은 빅테크 풀-스택이 부재한 가운데, 산업 데이터의 주권을 차별화 지점으로 삼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모델·연산 중심의 풀-스택 경쟁을 전개하는 것과 달리, EU는 산업 데이터 계층에 대한 주도권 확보를 통해 독자적 경로를 모색하고 있다. 즉, Gaia-X, Catena-X, Manufacturing-X 등 데이터 스페이스(Data Space)를 통해 제조 데이터의 기업 간 공유와 주권을 제도화함으로써 산업 데이터 계층의 운영 규칙 자체를 선점하려는 것이다. 방대한 제조 현장에서 생성되는 산업 데이터와, 규정·규제 설정을 통해 거버넌스의 규칙을 주도해 온 경험이 그 토대가 되고 있다. 그러나 모델·연산·반도체 등 상위 스택의 자체 역량이 부족해 데이터 계층의 주도권이 풀-스택 전반의 경쟁력으로 확장되기 어렵고, 다수 이해관계자들 간 조율이 필수적인 데이터 스페이스의 특성상 거버넌스의 파편화와 실행 지연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4. AX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대응 방향
주요국의 풀-스택 전략은 자국의 강점을 기반으로 공급 부문에서의 주도권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나라의 대응 방향에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AI 생산 스택의 상위 계층에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곤란하나, 범용 지능을 특정 산업 현장에 특화된 형태로 구현하는 영역, 즉 산업 특화형 AI(Vertical AI)는 우리의 고유한 제조 자산을 기반으로 경합이 가능한 영역이다. 범용 AI(Horizontal AI)가 산업을 가리지 않는 보편적 지능이라면, 산업 특화형 AI는 개별 산업의 데이터, 공정, 규제, 도메인 지식 등이 체화된 지능에 해당하며, 축적된 제조 경험 없이는 구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범용 AI에 집중하는 빅테크의 구조적 한계를 분석하고, 범용 지능이 특정 산업 현장에서 작동하도록 지원하는 인프라, 즉 AX 인프라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기회와 함께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 방향을 제시한다.
(1) 빅테크 주도 범용 AI의 한계와 우리나라의 기회
상술한 AI 생산 스택, 즉 AI 팩토리는 범용 지능의 대량 생산에 최적화되어 있다. 그러나 생산된 범용 지능의 실제 제조 현장 구현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다. 단순한 기술적 미비에 따른 한계가 아닌, 범용 지능 생산 체계에 내재하는 본질적 제약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한계는 우리나라의 기회 요인으로 해석된다.
첫째, 물리 세계와의 단절이다. AI 팩토리는 기본적으로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작동하므로 원거리 데이터센터와의 데이터 교환 과정에서 지연(latency)이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제조 현장의 설비 제어는 밀리 초(millisecond) 단위의 실시간 응답을 요구하며, 클라우드 왕복에 따른 지연은 이러한 실시간성 충족의 저해 요인이 된다. 더욱이 반도체, 방위산업 등 보안이 중시되는 분야는 망분리(폐쇄망) 환경을 전제로 하므로, 외부 클라우드와의 연결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운영 기술(OT)과 정보 기술(IT)을 잇는 융합 계층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범용 지능이 물리 세계에 접지될 수 없다.
둘째, 도메인 지식의 부재이다. 범용 모델은 특정 산업의 공정에 암묵지(暗默知)로 축적되는 제조 경험, 즉 숙련자의 감각과 경험을 내장하지 못한다. 도메인 지식은 데이터화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기능안전(Safety Integrity Level, SIL)6), 방폭(ATmospheres EXplosibles, ATEX)7), 품질관리와 같은 산업별 규제와도 연동되어 있지 않다. 이에 더해 이상이나 고장 등 학습에 필요한 사건 데이터가 희소해 범용 지능만으로는 현장의 문제를 충분히 통제하기 어렵다.
셋째, 공급 생태계의 부재이다. 현재의 AI 팩토리 구도는 범용 AI에 대한 수요만 창출될 뿐, 이를 현장에 구현하고 전달하는 공급 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범용 지능 공급자의 수익 모델이 범용 지능의 대량 생산을 통한 규모의 경제 달성에 기반하므로 자체적인 공급 체계 확보가 수익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범용 지능을 공급하는 주체(클라우드 사업자)와 이를 현장에 통합·전달하는 주체(SI, IT 및 OT 기업)가 서로 달라, 공급의 책임 소재가 불명확하다.
넷째, 피지컬 AI 학습 루프의 단절이다. 피지컬 AI는 가상의 시뮬레이션에 기반 학습 후 현실에 배포되는 과정을 거치나, 가상과 현실의 간극(reality gap)으로 인해 시뮬레이션만으로는 현장에 안정적 착지가 어렵다. 또한 현실 배포 후에는 성능이 저하되는 드리프트(drift)가 발생할 수 있음에도 이를 교정할 현장 피드백 루프와 모방 학습 데이터가 부재하다. 결국 현장 에지(edge) 단계에서 운영 기술과의 연동이 선행되지 않으면 학습 루프는 완결되지 않는다.
주목할 대목은 이러한 한계, 즉 도메인 지식과 공급 생태계의 부재가 빅테크가 풀-스택 전략을 채택하는 근본 동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빅테크는 산업에 특화된 도메인 지식과 현장 공급 기반을 외부에서 확보하거나 우회하려 한다. 다쏘(Dassault), 액센츄어(Accenture) 등 제조 경험과 도메인 역량을 보유한 기업과 풀-스택을 구성하는 엔비디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빅테크의 한계가 우리나라의 기회가 된다.
(2) 우리나라의 승부처, AI 생산에서 구현으로
AI 팩토리의 한계가 곧 우리나라의 기회라는 명제는 인프라 구축의 순서 관점에서 분명해진다. 유럽과 우리나라는 인공지능과 인프라를 도입해 온 순서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유럽은 인프라를 먼저 구축한 뒤 그 위에 인공지능을 적용하는 경로를 밟았다. 데이터 스페이스 인프라(Catena-X 등)를 2021년부터 구축하고, 그 위에 산업용 인공지능 플랫폼을 적용한 뒤, 최근에는 에이전틱 AI와 자율 운영이 이 플랫폼 위에서 작동하는 단계로 전개되고 있다. 그 결과 일부 선도기업에서는 생산 처리량의 향상과 라인 변경 시간의 단축, 나아가 부분적 무인화(Lights-out)가 실현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인공지능을 먼저 적용한 후 인프라를 보완하는 경로를 취하고 있다. 앵커기업 중심의 AI 팩토리 구축에 착수하고, M.AX 얼라이언스(Manufacturing AI Transformation Alliance)를 확장한 뒤, 데이터 표준과 5G, 데이터센터 등의 인프라를 사후적으로 추가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데이터 전처리에 전체 개발 시간의 70~80%가 소요되는 등 기초적 지능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순서의 차이는 인공지능의 작동을 뒷받침하는 공급 인프라가 정책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는 문제로 이어진다. 미약한 국내 공급 기반 위에서 인공지능 활용과 확산이라는 수요의 증가가 외산 솔루션에 대한 종속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국내 생태계의 약화와 함께 지속 가능한 AX 기반의 약화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스마트공장의 보급·확산 과정에서 경험한 시행착오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승부처는 빅테크가 구조적으로 확보하지 못한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실시간성과 폐쇄망 운영이 요구되는 영역이다. 망분리가 전제된 반도체·방위산업 등은 외산 클라우드가 원천적으로 진입할 수 없는 분야로, 국내 OT·에지 공급 역량이 보호받으며 성장할 수 있는 시장이다. 둘째, 도메인 지식과 공급 생태계의 영역이다. 오랜 기간 축적해 온 제조 경험과 SI·IT·OT 및 엔지니어링 기반은 흩어진 솔루션을 하나의 공급 산업으로 결집할 경우, 빅테크가 단기간에 모방하기 어려운 자산이 된다. 셋째, 학습 루프의 영역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적 수준의 실제 공장과 현장 데이터를 보유한 제조 강국이라는 이점은 가상과 현실의 간극을 닫고 현장 학습 루프를 완결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의 승부처는 인공지능을 ‘생산’하는 계층이 아니라, 생산된 지능을 산업 현장에 ‘구현’하는 계층에 있다.
(3) AX 수요·공급의 병행과 운영 표준 선점
이상의 논의는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인공지능의 도입·확산이라는 수요 부문 정책과, 그 인공지능을 현장에서 작동하게 하는 AX 인프라의 육성이라는 공급 부문 정책이 병행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와 같이 수요를 앞세우고 인프라를 뒤따르게 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공급 인프라에 대한 선제적 투자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수요의 확대가 국내 공급 역량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성장한 공급 역량이 다시 현장의 전환을 가속하는 선순환이 형성될 수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운영 표준(operational standard)의 선점이다. 인공지능을 둘러싼 표준 경쟁에서 칩과 개발 도구 등 기술 표준은 이미 미국과 유럽이, 기업 간 데이터 공유의 규칙인 데이터 표준은 유럽이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실제 제조 현장의 공정과 설비를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운영 표준은 아직 그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영역이다. 운영 표준은 공정 이상의 판정 기준, 설비 간 자율 협조의 규칙, 안전·품질 임계치의 설정 방식 등 현장 운영의 규범에 해당하며 현장의 축적된 운영 경험과 실제 데이터를 보유한 주체만이 정립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세계적 수준의 제조 역량과 현장을 갖춘 우리나라가 선점할 수 있는 현실적 승부처가 된다. 운영 표준을 선점한다면 우리나라는 외산 스택을 도입하는 데 그치는 위치에서 벗어나, 인공지능 기반 자율제조의 규칙을 설정하는 위치로 나아갈 수 있다.
다만 본고는 AX 인프라의 필요성과 그 개념, 그리고 우리나라의 승부처를 제시하는 데 초점을 두었으며, AX 인프라의 구체적 구성과 계층별 내용에 대한 논의는 후속 연구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5. 결론
소부장 공급망 위기는 완성품의 경쟁력만으로는 산업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며, 그 아래의 공급 계층을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인공지능 전환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제조 현장의 AX 확산이라는 수요 부문의 성공만으로는 인공지능 시대의 산업 주권이 보장되지 않으며, 공급 기반 부재 상태에서의 AI 확산은 오히려 해외 스택에 대한 종속을 심화시킬 수 있다.
글로벌 풀-스택 경쟁이 이미 제조 현장 계층으로 확대되는 지금,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인공지능을 ‘생산’하는 경쟁이 아니라 그 지능을 산업 현장에 ‘구현’하는 경쟁, 곧 우리의 강점인 제조 경험과 도메인 역량, 운영 기술이 작동하는 AX 인프라의 공급 역량을 수요 확산과 함께 강화하는 것이다. 나아가 기술 표준과 데이터 표준을 넘어 제조 현장에서의 인공지능 운영 표준 선점이 소부장의 교훈을 인공지능 시대에 되살리는 현실적인 산업 주권 전략이라 할 것이다.
